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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노국공주 간단 총정리

by #~%/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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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1330년 5월 6일 고려 제27대 충숙왕과 명덕황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민왕은 12세에 원나라에 부름을 받아 유년시절을 보냈다. 

공민왕이 정치적으로 큰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내린 선택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원나라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중매결혼을 통해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꿈꿔왔던 고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남편과 함께 머나먼 타국으로 간 노국공주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이는 고려 왕과 원나라 공주의 혼인관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깊은 문화예술적 감수성과 지식을 겸비한 궁합이 잘 맞았다.

더욱이 공민왕은 생전에 노국공주 외에는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놀라운 본색을 드러낸다. 공민왕은 몽골식 방호복을 버리고 변발을 폐지했다.

원의 풍습을 보고 고려의 전통을 복원하자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오랫동안 원나라에 살면서 원나라 공주와 혼인까지 했기 때문에 친원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빗나간 결과였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공민왕은 즉위 후 9년 동안 후사가 없었다.

원나라에 태어나 후손이 없었던 노국공주는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고민해야 했던 신하들은 노국공주를 찾아가 공민왕에게 새 아내를 맞이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민왕은 두 첩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공민왕 노국공주 부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후 공민왕 노국공주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식이 전해진다. 결혼 15년 만에 선물로 온 노국공주 임신 소식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출산 난관에 시달린 노국공주는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고려 부흥을 이끌 개혁 군주의 모습은 사라지고 무능하고 무기력한 암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공민왕은 국고를 들여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거대한 무덤과 기념관을 짓고,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동원되었다.

결국 공민왕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은 점차 이상한 행동으로 변해갔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부하 집단을 만들어 젊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하여 난잡한 행실을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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